레고, 함께할 수 있어 더 멋진 취미죠

직장인 원정식 씨는 퇴근 후 또 다른 작업실을 찾는다. 바로 자신의 레고 작업실이다. 90m² 크기의 작업실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은 양의 레고가 전시돼 있었다. 왕년에 레고 꽤나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원 씨의 취미와 컬렉션이 새삼 부러워질 만한 순간이었다.

레고 수집가 원정식 씨는 20대부터 레고를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몇 천 원대의 작은 레고도 있지만 웬만한 규모의 레고는 수십만 원을 호가하기에 어릴 적에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취미를 즐기기는 어려웠던 탓이었다.

“초등학교 때 돈을 모아서 레고를 산 적이 있었어요. 그때 부모님께 혼났었죠. 왜 이렇게 비싼 장난감을 샀느냐고요. 그게 한이 돼서 이렇게나 많이 모으고 있나 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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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레고를 사주는 대신에 사촌형들이 가지고 놀던 것을 받아왔고, 중학생이 될 무렵 다시 사촌동생들에게 물려줘야 했다. 20대부터 십수년간 레고를 모아온 덕에 약 2000개의 제품을 모으게 됐다. 레고 피규어만도 1만5000여 개가 될 정도다. 가격으로 따지면 2억 원에 달한다.
레고가 발매한 놀이기구 시리즈를 조합해 만든 놀이동산.
레고가 발매한 놀이기구 시리즈를 조합해 만든 놀이동산.
2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꾸민 미니 피규어. 3 레고 75019를 베이스로 만든 스타워즈 지노시스전투에 등장하는 기체. 4 영화 알라딘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2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꾸민 미니 피규어. 3 레고 75019를 베이스로 만든 스타워즈 지노시스전투에 등장하는 기체. 4 영화 알라딘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레고와 같은 블록 장난감은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레고는 사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조립을 해야 하는 제품이기 때문이다. 수집 이후 조립, 그리고 만들어 놓은 제품으로 피규어를 이용한 놀이를 할 수 있다.

원 씨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수집과 조립뿐 아니라 새로운 모형을 기획해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레고 제품을 모으면서 색깔과 모양이 동일한 벌크 형태의 레고도 모은다. 작업실 중앙에 각 방의 모습까지 세세하게 구현한 중세 성이나 말과 마차가 다니는 중세시대 마을, 수십만 원에 달하는 놀이기구 단품들을 모아서 만든 가로, 세로 각 2m 규모의 놀이동산 등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각종 디즈니 디오라마(풍경이나 그림을 배경으로 두고 축소 모형을 설치해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 풍경, 도시 경관 등 특정한 장면을 만들거나 배치하는 것) 등도 모두 그의 창작품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4>의 한 장면이나 영화 <알라딘>에서 알라딘이 병사들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 등을 재현해 놓았다. 기성제품을 조립해 놓은 것처럼 정교하고 완성도가 있는 것에 놀라울 정도였다.
5 대항해 시대를 배경으로 정부군의 모습을 재현한 창작배.
5 대항해 시대를 배경으로 정부군의 모습을 재현한 창작배.
6 영화 스파이더맨 2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7 영화 토이 스토리 4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6 영화 스파이더맨 2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7 영화 토이 스토리 4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레고를 만드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디오라마처럼 건축물을 만들거나 커다란 조각상 같은 스태추(statue)를 만드는 것. 원 씨는 디오라마를 주로 만들지만 가끔 스태추 작업도 한다. 그는 “덩어리를 쌓아서 만드는 것이 얼핏 힘들고 지겨울 것 같은데 완성돼 가는 모습을 볼 때 또 나름의 재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매년 수많은 레고 시리즈가 출시되지만 그중에서도 원 씨가 좋아하는 것은 캐슬 시리즈다.

“중세 시대물에 대한 판타지가 있어요. 레고는 1980년대 출시된 제품부터 꾸준히 캐슬 시리즈가 나오고 있어요. 저는 캐슬 시리즈를 이용해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역사를 기반으로 디오라마를 꾸미고 있어요. 또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군과 페르시아군의 전투를 재현하기 위해서 페르시아군과 스파르타군의 미니 피규어를 모으기도 했어요.”

그는 이 밖에 바이킹 병사, 사무라이, 이집트 병사 등의 피규어도 모았다. 한 종류당 100개씩은 모았는데 그래야 어느 정도 규모의 전투신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디오라마를 꾸미면 스토리텔링을 하기도 좋아서 재미도 배가 되죠. 제품군이 다양한 것도 캐슬 시리즈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열심과 노력은 최근 빛을 보고 있다. 혼자서 레고를 수집하고 조립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대외적인 전시 활동도 하게 된 것. 백화점이나 기업, 공공기관에서 전시 요청에 새로운 창작물을 전시할 기회도 마련됐다.

“제가 좋아서 하는 작업인데 운이 좋게도 초청 전시 기회가 생기니 너무 기쁘죠.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까요.”

지인들은 그의 이런 취미와 수집품을 부러워하는 눈치라고. 모두가 어릴 때 동경만 하던 것을 원 씨는 실제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많이 부러워하긴 해요. 이만큼 모으고 레고로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요. 가끔 친구 아이들이 놀러 오면 마음껏 만지고 놀게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레고를 저만 알고 즐기기엔 너무 아쉽기 때문이죠.”
8 원정식 씨가 레고를 조립하고 있다. 원 씨의 왼쪽에는 그가 직접 제작한 중세시대 성이, 뒤편에는 슈퍼마리오 스태추가 자리하고 있다.
8 원정식 씨가 레고를 조립하고 있다. 원 씨의 왼쪽에는 그가 직접 제작한 중세시대 성이, 뒤편에는 슈퍼마리오 스태추가 자리하고 있다.

다음은 원 씨와의 일문일답.

레고 창작은 어떻게 하나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흥미가 있는 장면을 찾아 사진을 보고 머릿속으로 설계를 합니다. 제가 가진 피규어들로 구현이 가능한지를 먼저 생각하죠. 저는 큰 틀을 잡아놓고 만들면서 구상을 수정하는 편입니다. 또 함께 디오라마를 만드는 팀이 있어요. 그분들과 협업을 하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 나가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작업하면 대형 작품도 시도해볼 수 있죠.”

가장 애착이 가는 레고가 있다면.
“1989년 발매한 레고 시리즈 중 6285품번 해적배를 일곱 살부터 중학생 때까지 소장했습니다. 추억이 많고 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이죠. 그런데 30년 세월이 흘러 6285의 리메이크 버전인 레고 아디어즈 21322 제품이 출시됐습니다. 그 당시 캐릭터들과 해적선이 리뉴얼 됐고 해적선장은 세월이 흘러 흰 수염이 나고 늙은 모습이라 저 어렸을 때와 지금 모습을 떠올리며 같이 시간을 보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앞으로 30년이 더 지나도 레고를 즐기고 있을 것 같습니다.”

레고를 더욱 잘 즐기는 방법을 소개한다면.
“저는 동호회에 가입해서 함께 즐기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특히 레고사가 공인한 커뮤니티가 있어요. 거기에 가입해서 활동하면 제품 구입 시 할인 혜택 등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다양한 레고를 접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저처럼 함께 팀을 짜서 대규모의 디오라마를 제작해볼 수도 있고요. 레고는 혼자 즐겨도 재밌는 취미지만 함께할 수 있어 더욱 멋진 취미인 것 같습니다.”

레고도 가격이 계속 오른다는데.
“네. 흔히 ‘레테크’라고도 합니다. 레고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이 오르고 내립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피규어의 경우 몇 천 원대에 살 수 있었던 게 몇 만 원, 몇 십만 원을 넘기도 합니다. 물론 레고 마니아들은 레고로 돈을 벌기보다는 더 비싼 금액을 주고서라도 레고를 수집하려는 마음이 더 클 것 같습니다.”

앞으로 레고를 통해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원래는 지난해에 레고 카페를 열려고 했어요. 레고 작품을 전시하고 체험해보는 카페를 기획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터지고서 열지 못하게 됐죠. 어쩌면 다행이에요. 코로나19가 터지고 열었으면 더 힘들었을 테니까요. 요즘에는 레고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여는 게 제 꿈이에요. 레고 창작자들은 각자 만드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시하고 다른 사람과 향유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잠깐! 레고 덕후 용어
레고 덕후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알아보자

미피
미니 피규어의 줄임말. 레고사는 매년 다양한 시리즈의 미니 피규어를 출시한다. 그동안 심슨, 디즈니 등의 시리즈가 사랑받았다. 올해는 ‘루니툰’ 캐릭터를 출시해 벌써부터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레고 덕후들은 미피 상자를 전부 사서 한 시리즈 전체를 구현해낸다.

미스박(MISB)
개인 간 레고 거래 시 통용되는 용어. Mint in Sealed Box의 줄임말로 박스를 열지 않은 제품이라는 뜻이다. ‘mint’는 매직더개더링 같은 카드게임계에서 쓰는 단어인데 아주 새것 같은 깨끗한 상태를 말한다. 개봉하지 않은 제품일수록 가격은 당연히 비싸다. 특히 1980년대 미스박 제품은 부르는 게 값이다.

칼박
미스박 상태에서도 박스가 전혀 흠집이나 구겨짐 없이 칼날 같은 모서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칼박(스)이라고 한다.

니브(Nib)
New in Box의 줄임말. 즉, 박스만 개봉한 새 레고 제품이다. 박스만 열려 있고 내용물은 레고를 담은 봉투가 찢김없이 들어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레고 커뮤니티에서는 미스박과 니브 구분을 엄격히 한다. 이 때문에 박스가 열렸는지 여부에 따라 가격이 몇 만 원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유즈드(중고)
레고를 조립하는 이른바 ‘손맛’을 즐기고 파는 이들이 거래한다. 박스와 설명서, 조립 후 분해된 레고가 들어 있다. 당연히 분실되거나 파손된 브릭은 없는 상태다. 중고이기 때문에 가격은 새 제품보다 저렴하게 거래되지만 단종된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인스
레고 박스 안에 함께 들어 있는 조립 설명서. 인스트럭션(instruction)을 줄여서 ‘인스’라고 부른다.

카톤박스(Carton Box)
레고코리아 공식 쇼핑몰에서 레고를 구입할 때 포장돼 온 노란 골판지 박스.

UCS
Ultimate Collector Series의 약자. 레고 마니아를 위해 실제와 거의 흡사할 만큼 사실적 형태로 재현한 제품으로 블록의 조각 수가 1000개 이상일 정도로 많고 가격도 매우 비싸다. 장식용 스탠드와 설명판이 포함돼 전시용 프라모델에 가깝다.
만번대 레고는 제품마다 고유 숫자가 있는데 1만 번대 제품은 보통 전문가용으로 규모가 큰 제품이 많다.

알바 시리즈
레고사에서 매년 출시하는 미니 피규어 시리즈 중 동물이나 사물 탈을 쓴 미니 피규어를 알바 시리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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